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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밤 (4)」, 김유진 해진은 여전히 내 품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이제는 정말로 그녀가 우리의 집에 진절머리를 느껴 나가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진이 사라지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부턴가 식탁 위에 수저를 두 개만 올려놓는 데 익숙해졌다. 이제는 2인분에 맞춰 밥을 짓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매일같이 해진의 방에 들어가 청소를 해주고 나오면서도 해진의 손이 탄 물건들을 전처럼 오래 바라보는 일은 없었다. 해진의 수첩에 적힌 마지막 기억은 여전히 영천산에 머물러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리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미리는 얼마 전 내 요청을 듣고 잠시 당황한 듯 보였다가, 기자에게 연락해 보겠노라 말한 뒤에는 한 번도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무래도 .. 2023. 2. 23.
「돌아오는 밤 (3)」, 김유진 할아버지는 영천산이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고 수도 없이 말했다. 영천산은 작고 낮아 볼품없었지만 그래서 눈에 띄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전쟁이 났을 때 온 가족을 데리고 영천산에 숨었다고 말했다. 당신이 징병이 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조상께 거듭 사과하며 무덤 근처에 구덩이를 파 그 안에 몸을 숨겼더랬다. 전염병이 돌아 자식 하나가 목숨을 잃었을 때도 그랬고, 내 아버지가 서울로 상경하겠노라 읊었을 때도 그랬다. 할아버지에게 영천산은 종산 이전에 도피처였다. 그는 자신을 조상들이 지켜주는 게 분명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인지, 영천산을 팔아버리는 그 순간에도 그들은 자신을 용서해 줄 것이라고 몇 번이고 중얼거리고는 했다. 그러고는 부모자식 간의 의를 끊겠다, 으름장을 놓았던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2023. 2. 23.
「돌아오는 밤 (2)」, 김유진 영천의 우리가 살던 곳까지 오기 위해서는 고속버스에서 내리고 나서도 버스를 두 번 더 갈아타야 했다. 서울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던 대형마트 하나 없는 영천에 하룻밤 묵을 호텔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낡은 건물 몇 개를 헐고 새로 주택을 올린 게 눈에 보이는 변화의 전부였다.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이들은 내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급한 대로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여인숙 이름을 따라 홀린 듯이 그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산을 올라 해진을 찾아볼 계획이었다. 산에서 해진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도 딱 지금과 비슷한 시간이었다. 당장이라도 해진을 찾아 산을 이 잡듯 뒤지고 싶다는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도무지 다리가 떨어지지를 않았다.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바로 등산.. 2023. 2. 23.
「돌아오는 밤 (1)」, 김유진 근 2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영천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서울이 빠르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동안 이 동네는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택시를 타고 1시간은 족히 달려서 찾아온 적막한 동네는 내가 이곳을 떠났을 때의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작은 슈퍼가 편의점이 되고, 낡은 오락기가 인형뽑기 기계가 되는 수준의 변화만 엿보일 뿐이었다. 인터넷에 주소를 검색해봐도 마을회관 하나라도 나오면 다행인 곳에 내가 다시 발을 들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교통수단도 변변치 않아서 해진이 여기까지 왔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렇지만 더 이상은 내게 남은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드물게 외부인이 발을 들인 것이 신기해서인지 늦은 시간까지 거리를 돌아다니는.. 2023. 2. 23.
「오랜만에 어린 왕자를 읽고」, 장효정 *윤하: 친구 이름 오랜만에 윤하랑 홍대 근처에서 보기로 했다. 윤하랑 ‘홍대 에서 뭘 할까’ 고민하다가 윤하가 전시회를 좋아한다고 해서 어린 왕자 전시회를 보자고 했다. 근데 윤하가 알고 보니 어린 왕자의 광팬이라고 해서 바로 우리 코스에 넣게 되었다. 사실 어린 왕자를 읽은지 너무 오래돼서 윤하 만나기 전에 한 번은 읽고 가야지 생각했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홍대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핸드폰 앱으로 읽게 됐다. 신기한 건 내가 어린 왕자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는 거다. '어린 왕자’ 하면 굉장히 유명한 일러스트로 만 머릿속에 남아있었지, 어린 왕자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 어떤 여정을 겪었는지는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와닿았다. 어려서 읽은 후로 거의 기억해내지 못했던 인물은 가로등지.. 2023. 2. 20.
「종이비행기 접는 남자」, 현하월 종이비행기 접는 남자 현하월 내 종이비행기는 날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종이비행기를 잘 접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세상에서 가장 종이비행기를 못 접는 사람은 나다. 언젠가 어렸을 적 단 한 번 내가 접은 종이비행기가 날았던 적이 있었다. 바람에 흐느끼는 듯한 나풀거림은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땅 위에서 단지 2m가량 비행했을 뿐이지만 내 기분만큼은 우주를 항해하는 듯했다. 그 이후로 몇 번이나 종이비행기를 접었지만 즉시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조금이라도 날다가 땅으로 착륙하는 것이 아니라 촛불에 이끌린 불나방처럼 미친 듯이 곤두박질쳤다. 더는 날지 못하게 된 파리같이 끝없이 추락했다. 그 이후로 꽤 오랫동안 난 종이비행기를 접지 않았다. 입사한 지 몇 년이나 지난 요즘에 들어서야 다시 종이비행기.. 2020. 12. 10.
「가리어진 길」, 안희주 가리어진 길 안희주 길을 잃었습니다. 저 앞에 나아가는 이의 발자국만 따라가다 가리워진 자욱에 고개를 들고 보니, 눈앞이 아주 컴컴하덥니다. 이름도 모르는 주인에게 어디 있냐 소리치면 당연히 들리는 건 고요한 바람 소리 뿐. 그 바람 어디서 온 건지 끄트머리라도 잡아보려다 차마 내가 애처로워 주저앉아버리고 비로소 혼자가 됐음을 깨달은 나는 어둠이 모든 걸 뭉갤 때 까지 한숨만 내쉬다 하루를 다 보냅니다. 거기 누구 없어요! 나 좀 찾아주세요! 태어날 때부터 쫓는 게 편한지라 스스로 일어날 마음은 끝내 나를 들지 못하고 보일 듯 말 듯 한 길을 그저 바라만 보덥니다. Thumbnailed by Holden Baxter 2020. 12. 3.
「소음(下)」, 츠키 소음(下) 츠키 멍하니 혼자만의 장소를 찾기 위해 걸어온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드라마, 영화에서는 이런 곳에 잘 와서 잘 울고 끝났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한 편의 드라마를 찍으면 스태프들이 고생을 하듯, 아팠던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그 후에 고생하는 나였다. 어떻게 여기를 헤쳐 들어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단 3~4시간 만에 같은 길을 다르게 느끼다니 사람이란 신기한 존재였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나는 어쩌면 평생 이 일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웃으며 말하든, 울며 말하든, 화내며 말하든 이 일에 대해 떠들며 살 것이다. 어쩌면 계속 아플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질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만나도 사랑을 할 수 없는 불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 2020. 11. 26.
「소음(上)」, 츠키 소음(上) 츠키 「탁. 탁. 카캉캉. 와하하.」 또 시작이다. 처음에야 놀랐을 뿐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억지로 겨우 들었던 옅은 잠이 다 깼다. 여전히 편두통이 있어서 찬 손으로 뜨거운 머리를 짚었다. 머리에 심장이 있는 것 같았다. 찬 손에는 얕은 피부가 맞닿았다. 그 밑에 혈액은 웅클웅클 지나갔다. 그 느낌이 꽤 괴이했다. 내 손은 찼고 그 위에 달린 팔은 추웠다. 집이 너무 추웠다. 아마도 집을 지을 때 돈을 적게 쓰기 위해 외벽을 얇게 지은 게 분명했다. 집은 너무 잘 식었다. 세 시간 넘게 난방을 해도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추워지곤 하였다. 벽에서부터 한기가 느껴져 나는 잠시 머리를 벽에 붙였다. 어둡고 차가운 방 안에서 나는 아파했다. 그리고 밖은 축제였다. 흔한 시내인 앞동네와 달리, 뒷.. 2020. 11. 19.
「노」, 안희주 노 안희주 물이 들어온다. 폭풍우가 밀려온다. 노를 젓자. 노를 젓자. 선장님 저는 저 길로 가고 싶어요. 저쪽은 절대 안 돼. 어서 노를 젓자. 영차 영차 엇박 정박 선장님 저는 이 길은 싫어요. 정신 좀 차려라. 어서 노를 젓자 영차 영차 엇박 정박 이 길이 맞겠거니 보이는 게 길이려니 하다가 풍덩! 허우적대는데 선장님 저를 왜 빠뜨렸나요? 내가 빠뜨렸냐? 네가 빠진 거지. 누구의 손도 잡지 못하고 깊숙이 더 깊숙이 빠지다 숨 막혀 눈 감으면 나는 어떤 미련으로 삶을 보내주려나. Thumbnailed by Maximilian Weisbecker 2020.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