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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어진 길」, 안희주 가리어진 길 안희주 길을 잃었습니다. 저 앞에 나아가는 이의 발자국만 따라가다 가리워진 자욱에 고개를 들고 보니, 눈앞이 아주 컴컴하덥니다. 이름도 모르는 주인에게 어디 있냐 소리치면 당연히 들리는 건 고요한 바람 소리 뿐. 그 바람 어디서 온 건지 끄트머리라도 잡아보려다 차마 내가 애처로워 주저앉아버리고 비로소 혼자가 됐음을 깨달은 나는 어둠이 모든 걸 뭉갤 때 까지 한숨만 내쉬다 하루를 다 보냅니다. 거기 누구 없어요! 나 좀 찾아주세요! 태어날 때부터 쫓는 게 편한지라 스스로 일어날 마음은 끝내 나를 들지 못하고 보일 듯 말 듯 한 길을 그저 바라만 보덥니다. Thumbnailed by Holden Baxter 2020. 12. 3.
「노」, 안희주 노 안희주 물이 들어온다. 폭풍우가 밀려온다. 노를 젓자. 노를 젓자. 선장님 저는 저 길로 가고 싶어요. 저쪽은 절대 안 돼. 어서 노를 젓자. 영차 영차 엇박 정박 선장님 저는 이 길은 싫어요. 정신 좀 차려라. 어서 노를 젓자 영차 영차 엇박 정박 이 길이 맞겠거니 보이는 게 길이려니 하다가 풍덩! 허우적대는데 선장님 저를 왜 빠뜨렸나요? 내가 빠뜨렸냐? 네가 빠진 거지. 누구의 손도 잡지 못하고 깊숙이 더 깊숙이 빠지다 숨 막혀 눈 감으면 나는 어떤 미련으로 삶을 보내주려나. Thumbnailed by Maximilian Weisbecker 2020. 11. 12.
「흔적」, 적 율 흔적 적 율 잘게 일렁이는 내 모습을 견디지 못해 투박한 주먹질로 호수의 껍데기를 부수고 부수다가 튀어 오른 물방울에 찔린 손바닥의 자상 짤막한 생명선을 가르고 아가리를 벌린 상처는 한참을 실실대다가 결국 손금으로 아물어버렸다 손가락 사이에 뾰족하게 간 연필을 끼우고 쓰다 글자가 뭉개질 때까지 놓지를 못해 쥐가 났고 꼭 종이를 찌르는 마냥 쓰는구나, 네가 말했다 남아있는 원고는 없지만 책상을 쓸면 언제고 느껴져 달아오른 얼굴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지만 모멸과 비난을 기꺼이 되새김질하던 나는 고작 한 뼘 안에 고스란히 남아 차마 얼굴을 묻을 수도 없게 되었다 Thumbnailed by Milada Vigerova 2020. 11. 5.
「계절을 지키는 사람」, 안희주 계절을 지키는 사람 안희주 할아버지는 새벽 4시가 되면 일어나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적막 속에서 조용히 방문을 연다. 휴대폰 하느라 잠 못 든 내가 자는 척 눈 감으면 어둠 속에서 찬찬히 할아버지 소리가 들린다. 푸석푸석 밥 푸는 소리. 챙챙 가방 챙기는 소리. 달달달 경운기 시동 켜는 소리. 이 모든 소리가 멀어질 때쯤 난 그제 서야 잠이 든다. 점심에 돌아오는 할아버지는 늘 계절 냄새를 가져온다. 봄에는 찌든 비료 냄새 여름에는 잔뜩 쉰 땀 냄새 겨울에는 타는 듯한 장작 냄새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계절 냄새. 그래서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싫어한다. 혼자가 된 할아버지는 술과 친구가 됐다. 또 술이냐고 혀 차는 아빠 잔소리를 안주 삼아 한잔, 두잔 오늘도 할아버지는 술을 마신다... 2020. 10. 29.
「화살(花殺)」, 안희주 화살(花殺) 안희주 꽃 한 송이를 꺾었습니다. 초록 알을 깨고 나온 새 생명들이 아이 따뜻하다 얼굴을 들이미니까 생각나는 얼굴이 그 하나뿐인데 생각나는 얼굴이 그 하나뿐이라 꽃을 꺾었습니다. 꺾은 두 손 피로 가득 물든 것도 모른 체 내 숨이 나를 먹을 때까지 당신에게 뛰어갔습니다. “넌 이기적이야” 검붉은 자욱이 하는 말에 누구의 탓도 하지 못하는 나는 차마 당신 앞에 서지 못하고 고개를 돌립니다. 그런데 그 틈 사이로 보이는 당신의 얼굴이 한없이 아름다워 한없이 아름다워 나는 그만 넋을 잃고 다 시들어버린 꽃을 짓밟아 뭉개버립니다. 탓할 구실이 생긴 나는 더 이상 죄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꽃 한 송이를 더 꺾었습니다. Tumbnailed by Han Chenxu 2020. 10. 15.
「군고구마」, 안희주 군고구마 안희주 영하로 치닫는 온도에 나는 나를 싸맨다. 한 겹 두 겹 그렇게 쌓다 보면 한 줄기 바람도 날 이길 수 없더라. 그러나 어떤 날은 그런 것도 무용지물 무심한 너의 손길에 나는 발가벗겨져 부끄러워 아무리 싸매려 해도 네 앞에서 나는 날것이 되어버린다. “오늘 춥지 않아?” 가까스로 꺼낸 첫마디는 허연 입김이 되어 공중에 떠다니지만 사실 나는 다른 말을 하고 있어. 그 말은 너에게 먹혀 영영 위 속에서 영영 몸속에서. Thumbnailed by Roxane Clediere 2020. 9. 24.
「여름병」, 적 율 여름병 적 율 지난겨울 머리맡에 난 창문을 열어두지 않고는 잠들지 못했다 한겨울 찬바람에 홧홧한 늑골을 식혀야 달뜬 몸이 겨우 잠들었다 버려지고 버림받는 8월의 한 가운데 아스팔트 아지랑이 속에서 나는 누구를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역전 교차로를 돌고 돌았다 값싼 외투를 매무시할 때 즈음에야 유난히 길던 그해 여름 내가 나를 두고 달아난 것을 문득 알아차렸다 한참을 뒤척이던 이마에 나를 돌려받으러 찾아온 식은 손이 한숨처럼 내려앉았다 여태 여름을 앓고 있었니 꿈결에 두고 간 마른 연민이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Thumbnailed by Tetiana-Shevereva 2020. 9. 17.
「지하철」, 안희주 지하철 안희주 네모난 상자 속 어깨와 엉덩이가 은근히 닿으며 하루를 같이 보내지만 한 번도 눈길이 닿은 적은 없다. 누가 보면 정 없다 할 것이고 누가 보면 이들과 나 사이에 섬이 있다 하겠지만 사실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어쨌든 간에 새벽까지 불빛은 켜져 있고 잔들이 부딪쳐 만들어진 순간은 별이 되어 거꾸러진 밤하늘을 비추니 말이다. Thumbnailed by Eutah Mizushima 2020. 9. 10.
「사월(沙月)」, 이현승 사월(沙月) 이현승 손끝으로 바람이 드는 병에 대하여 무엇이 되지 못해 떠났던 자리에 돌아온 사람은 여전히 무엇도 되지 않은 채로 등을 붙이기 무섭게 잠들곤 했습니다 딱 목까지만 물에 잠긴 기분으로, 머리맡에 들고 나는 바람에 집중하는 동 안 과음은 이어졌고 누운 모양을 본떠 자리는 젖어가고 그 새에 핀 열꽃을 귀향쯤으로 부르기 로 한 약속은 어겨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울지 않고는 낼 수 없는 발음, 이제 발음해서는 안 될 호칭, 여전히 몇 자 리에 남은 이름과 이름, 호환되지 않는 교감과 부교감 어느 때엔 사람에 기대는 것을, 무게가 없을 만큼 하찮고 가벼운 그 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어림으로 떠난 자리에 젊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신은 저를 보자마자 손끝으로 바람이 드는 병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이겨내야 할.. 2020. 6. 4.
「반지」, 적 율 반지 적 율 해를 거듭할수록 몰려드는 군중들은 내 왼손가락에 차꼬를 채우려 달려든다 단지한 지 오래라 뭉툭하게 아문 밑동에 꽁꽁 동여매 둔 의지라도 던져줄까 하니 긴 혀를 내두르며 감히 미래를 점친다 그들은 나의 등허리를 똑 뜯어내어 묵직한 악법과 인습 사이에 끼워놓고 먼지 쌓인 서재 한 귀퉁이에 밀어 넣을 것이다 흔하고 고루한 생의 페이지 속에서 질식한 채 있는 듯 없는 듯 반듯이 건조되도록 누군가 드리운 가름끈을 붙잡고 말라붙은 틈새를 비집고 나오면 촘촘히 어깨를 붙이고 들어앉아 있는 내 얼굴을 한 무명의 삶들이 보일 것이다 그 아득한 역사는 묵은내를 풍긴다 나는 종종 그들의 표정을 떠올린다 그런 날이면 잠드는 것도 잊고 나는 목구멍이 울렁일 때까지 냉수를 들이켠다 퉁퉁 부은 얼굴로 자리에 누우면 추.. 2020. 5.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