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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18

「돌아오는 밤 (4)」, 김유진 해진은 여전히 내 품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이제는 정말로 그녀가 우리의 집에 진절머리를 느껴 나가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진이 사라지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부턴가 식탁 위에 수저를 두 개만 올려놓는 데 익숙해졌다. 이제는 2인분에 맞춰 밥을 짓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매일같이 해진의 방에 들어가 청소를 해주고 나오면서도 해진의 손이 탄 물건들을 전처럼 오래 바라보는 일은 없었다. 해진의 수첩에 적힌 마지막 기억은 여전히 영천산에 머물러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리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미리는 얼마 전 내 요청을 듣고 잠시 당황한 듯 보였다가, 기자에게 연락해 보겠노라 말한 뒤에는 한 번도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무래도 .. 2023. 2. 23.
「돌아오는 밤 (3)」, 김유진 할아버지는 영천산이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고 수도 없이 말했다. 영천산은 작고 낮아 볼품없었지만 그래서 눈에 띄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전쟁이 났을 때 온 가족을 데리고 영천산에 숨었다고 말했다. 당신이 징병이 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조상께 거듭 사과하며 무덤 근처에 구덩이를 파 그 안에 몸을 숨겼더랬다. 전염병이 돌아 자식 하나가 목숨을 잃었을 때도 그랬고, 내 아버지가 서울로 상경하겠노라 읊었을 때도 그랬다. 할아버지에게 영천산은 종산 이전에 도피처였다. 그는 자신을 조상들이 지켜주는 게 분명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인지, 영천산을 팔아버리는 그 순간에도 그들은 자신을 용서해 줄 것이라고 몇 번이고 중얼거리고는 했다. 그러고는 부모자식 간의 의를 끊겠다, 으름장을 놓았던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2023. 2. 23.
「돌아오는 밤 (2)」, 김유진 영천의 우리가 살던 곳까지 오기 위해서는 고속버스에서 내리고 나서도 버스를 두 번 더 갈아타야 했다. 서울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던 대형마트 하나 없는 영천에 하룻밤 묵을 호텔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낡은 건물 몇 개를 헐고 새로 주택을 올린 게 눈에 보이는 변화의 전부였다.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이들은 내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급한 대로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여인숙 이름을 따라 홀린 듯이 그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산을 올라 해진을 찾아볼 계획이었다. 산에서 해진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도 딱 지금과 비슷한 시간이었다. 당장이라도 해진을 찾아 산을 이 잡듯 뒤지고 싶다는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도무지 다리가 떨어지지를 않았다.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바로 등산.. 2023. 2. 23.
「돌아오는 밤 (1)」, 김유진 근 2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영천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서울이 빠르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동안 이 동네는 변한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택시를 타고 1시간은 족히 달려서 찾아온 적막한 동네는 내가 이곳을 떠났을 때의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작은 슈퍼가 편의점이 되고, 낡은 오락기가 인형뽑기 기계가 되는 수준의 변화만 엿보일 뿐이었다. 인터넷에 주소를 검색해봐도 마을회관 하나라도 나오면 다행인 곳에 내가 다시 발을 들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교통수단도 변변치 않아서 해진이 여기까지 왔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렇지만 더 이상은 내게 남은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드물게 외부인이 발을 들인 것이 신기해서인지 늦은 시간까지 거리를 돌아다니는.. 2023. 2. 23.
「종이비행기 접는 남자」, 현하월 종이비행기 접는 남자 현하월 내 종이비행기는 날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종이비행기를 잘 접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세상에서 가장 종이비행기를 못 접는 사람은 나다. 언젠가 어렸을 적 단 한 번 내가 접은 종이비행기가 날았던 적이 있었다. 바람에 흐느끼는 듯한 나풀거림은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땅 위에서 단지 2m가량 비행했을 뿐이지만 내 기분만큼은 우주를 항해하는 듯했다. 그 이후로 몇 번이나 종이비행기를 접었지만 즉시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조금이라도 날다가 땅으로 착륙하는 것이 아니라 촛불에 이끌린 불나방처럼 미친 듯이 곤두박질쳤다. 더는 날지 못하게 된 파리같이 끝없이 추락했다. 그 이후로 꽤 오랫동안 난 종이비행기를 접지 않았다. 입사한 지 몇 년이나 지난 요즘에 들어서야 다시 종이비행기.. 2020. 12. 10.
「소음(下)」, 츠키 소음(下) 츠키 멍하니 혼자만의 장소를 찾기 위해 걸어온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드라마, 영화에서는 이런 곳에 잘 와서 잘 울고 끝났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한 편의 드라마를 찍으면 스태프들이 고생을 하듯, 아팠던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그 후에 고생하는 나였다. 어떻게 여기를 헤쳐 들어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단 3~4시간 만에 같은 길을 다르게 느끼다니 사람이란 신기한 존재였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나는 어쩌면 평생 이 일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웃으며 말하든, 울며 말하든, 화내며 말하든 이 일에 대해 떠들며 살 것이다. 어쩌면 계속 아플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질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만나도 사랑을 할 수 없는 불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 2020. 11. 26.
「소음(上)」, 츠키 소음(上) 츠키 「탁. 탁. 카캉캉. 와하하.」 또 시작이다. 처음에야 놀랐을 뿐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억지로 겨우 들었던 옅은 잠이 다 깼다. 여전히 편두통이 있어서 찬 손으로 뜨거운 머리를 짚었다. 머리에 심장이 있는 것 같았다. 찬 손에는 얕은 피부가 맞닿았다. 그 밑에 혈액은 웅클웅클 지나갔다. 그 느낌이 꽤 괴이했다. 내 손은 찼고 그 위에 달린 팔은 추웠다. 집이 너무 추웠다. 아마도 집을 지을 때 돈을 적게 쓰기 위해 외벽을 얇게 지은 게 분명했다. 집은 너무 잘 식었다. 세 시간 넘게 난방을 해도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추워지곤 하였다. 벽에서부터 한기가 느껴져 나는 잠시 머리를 벽에 붙였다. 어둡고 차가운 방 안에서 나는 아파했다. 그리고 밖은 축제였다. 흔한 시내인 앞동네와 달리, 뒷.. 2020. 11. 19.
「그곳」, 김순요 그곳 김순요 A는 아주 유명한 크리에이터이자 ‘광장’의 최고 관리자다. 내가 집구석에서 《가상공간의 역사》를 읽고 요약을 하는 과제로 머리 뜯는 동안에 A는 ‘광장’의 유명한 쇼에서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여 실시간으로 코인을 쓸어 담았다. 한 번 출연으로도 내가 살고 있는 집 정도는 우스울 만큼 벌었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A만 보면 배가 아픈 만성 질환으로 고생했다. 내가 앉은 곳 맞은편 창문에서 뮤직비디오가 틀어졌다. 때 묻은 유리창에 뿌연 가수의 얼굴이 나왔다. 나는 아직 마시지 않은 라떼를 티스푼으로 저으며 창문 너머를 보려고 애썼다. 곧 B가 가수의 얼굴을 스쳤다. (편의상 B라고 부르기로 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람과 완전히 딴판인 아저씨가 카페 안으로 들어오자,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2020. 10. 22.
「담배와 초콜릿」, 츠키 담배와 초콜릿 츠키 어렸을 적에 이가 많이 썩었었다. 양치도 제대로 하는데 자꾸만 썩는 이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만나는 의사 선생님마다 이렇게 어린 나이부터 이가 약하면 나중에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선물 받은 아몬드 초콜릿을 아주 높은 천장 위에 올려두었다. 하지만 나는 초콜릿을 너무나도 좋아했고 아몬드 초콜릿의 맛이 궁금했다. 그래서 엄마가 집을 비울 때 그 아몬드 초콜릿을 몰래 꺼내 먹었다. 초콜릿이 있는 곳은 아주 높은 곳이라 싱크대 위에 올라가서 까치발까지 들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초콜릿을 먹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손에 넣은 아몬드 초콜릿은 너무나도 맛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한 통을 다 먹어버렸다. 물론 곧 머지않아 정직하게 썩은 .. 2020. 10. 8.
「오래된 이야기」, 은옥 오래된 이야기 은옥 동그란 얼굴에 솜털이 간질었다. 그 상반신은 두꺼운 가죽으로, 하반신은 풀인지 털인지 빳빳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팔과 다리는 나뭇가지와 비슷했고 그것을 꺾고자 한다면 관절이 생겨났다. 그 존재가 자신의 이름도 없이 그저 시간이 흐름에 흘러 다녔다. 그 존재는 언젠가 아이를 발견했다. 알록달록한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마른 나무를 꼬고 사이에 하얀색의 얇은 것이 있는 것을 쓰고 있었다. 언제고 그 자리에 있는 아이가 있었다. 처음엔, 그저 나무 위에 올라 지켜보았다. 형형색색의 것들이 눈을 사로잡아 놓아주지 않았다. 자신과는 다른 화려한 것들에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일 거라. 처음에는 색을, 그 뒤에는 아이가 보였다. 아이의 눈동자는 항상 같은 곳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는.. 2020. 6. 8.